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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함양으로 떠나는 정자 여행

조회 : 1,841 다볕지기

선비의 고장 함양으로 떠나는 정자 여행

들쭉날쭉한 바위 맞춰 기둥 길이 제각각
동호정 화려·군자정 소박·거연정 수려
자연미 물씬… 옛 선비들 풍류와 멋 느껴져

     
전북 장수에서 육십령(734m)을 넘어가면 경남 함양이다. 함양은 예로부터 ‘정자의 고장’으로 불렸다. ‘좌 안동·우 함양’이라고 불릴 만큼 함양은 일찍부터 묵향이 가득한 선비의 고장이었다. 이런 연유로 정자문화도 발달했다. 무려 80여개에 달하는 정자와 누각이 함양군의 경승지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다. 정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경치가 수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던 시절, 옛 선비들에게 가장 좋은 피서지는 숲이 우거져 그늘이 좋고 얼음물같이 차가운 계류가 흐르는 정자였다. 선비들은 정자에 앉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도 뜯었다. 그러다 정자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탁족도 즐겼고, 멱도 감았다.

상림 옆에 자리한 거대한 연꽃밭.
함양 정자 문화의 진면목을 맛보려면 안의면 화림동계곡으로 가야 한다.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가며 곳곳에 크고 작은 못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엔 여덟 개의 못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때 화림동계곡을 대표하던 정자는 농월정(弄月亭). ‘달빛을 희롱한다’는 이름 그대로, 시원하고 호쾌한 주변 풍광을 거느린 2층 누각의 아름다운 정자였으나, 2003년 방화로 소실돼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동호정은 함양 화림동 계곡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정자 앞에는 수십명은 족히 앉아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인 ‘차일암’이 있다.
주인 잃은 ‘농월정 국민관광단지’의 쓸쓸한 모습을 뒤로하고 3㎞쯤 올라가면 계곡을 굽어보며 당당하게 서 있는 동호정(東湖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화림동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자인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들이 세웠다.

누에 오르려면 나무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생김새가 이채롭다. 통나무 2개를 잇대어 비스듬히 세운 뒤 도끼로 내리쳐 홈을 파 만들어 자연미가 한껏 살아 있다. 정자를 지탱하고 있는 통나무 기둥도 선을 고르지 않았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 평평하게 만들지 않고 바위의 모양새에 맞춰 건물을 지으려고 이같이 나무를 다듬지 않았을 게다. 동호정 앞에는 길이 60m인 커다란 너럭바위가 섬처럼 떠 있다. 차일암(遮日岩)이다. 햇빛을 가린다는 이름이나, 바위 곳곳에 새겨진 글씨들을 보면 선비들이 풍류처로 애용했던 게 분명하다. 

동호정을 뒤로하고 1㎞쯤 계곡을 올라가면 군자정이 나타난다. 군자정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세운 정자. 커다란 돌 위에 사뿐히 앉아 있는 이 정자는 소복하고 조촐하지만, 기품이 살아 있다.

함양 화림동 계곡 정자 중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을 지닌 거연정.
군자정에서 100여m를 더 올라가면 거연정(巨然亭)이 자리 잡고 있다. 누정(樓亭) 자체의 아름다움은 동호정이 앞서지만, 주변 경치가 수려하기로는 최상류에 자리한 이 거연정을 으뜸으로 친다. 정자가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조화를 이루는 모습도 거연정이 최고다. 거연정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72년 후손들이 세웠다. 동호정과 달리 거연정은 계곡 가장자리가 아닌 계곡 중간 바위 위에 걸쳐져 있다. 거연정이 놓인 자리는 바닥이 고르지 않고 들쭉날쭉한 바위로 되어 있는데, 원래 그 상태에서 주초석을 놓고 건물을 올렸다. ‘화림교’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 수 있는데, 이 녹슨 철교는 ‘옥에 티’다. 주변 풍광과 영 어울리지 않아 눈에 거슬리고 아쉬움이 남는다. 

다리만 건너면 정자와 바위, 계류가 빚어내는 멋진 풍광이 눈앞에 가득 찬다. 정자 앞을 흐르는 물을 옛 선비들은 ‘방화수류천(訪花隋柳川)’이라고 불렀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이 정자에 앉아 계곡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위에 떠가는 꽃잎을 좇다 보면, 내가 곧 자연이 되고, 자연이 곧 내가 된다. 그러다 보면 무더위는 어느새 저만큼 물러가지 않았을까.

함양=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