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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선비와 누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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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누정(樓亭)문화
. 앞에는 시냇물이 돌아 흐르고 뒤에는 바위벼랑이 있고 거기에 아름드리 노송이 몇 그루 서 있는 곳이라면 정자 자리로서 명당일 것이다. 비롯 자연 속에 들어선 인공물이라지만 자연을 훼손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위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원형의 아름드리 굵직한 기둥이나 날아갈 듯 민첩하면서도 빼어난 기와지붕의 곡선은 가히 예술적 극치라 할 수 있고 이곳은 사람이 사는 주택은 아니지만 선비들이 사색하거나 덕담을 나누고 주연을 베푸는 곳으로 그 기능은 유흥상경(遊興賞景)에 있었다. 또한 시를 읊거나 우국충정을 논하고 연희를 통해 사교를 다지는 등 정자는 선비문화의 요람지였었다. 정자는 형태별로 보면 사람이 건물을 지은 정자와 건축물이 없는 자연물 정자가 있는데 건축물 정자는 전통한옥 양식으로 목조에 기와를 얹은 일반적인 와정과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엮은 모정(茅亭)이 있고, 자연물 정자는 커다란 나무아래 쉴 수 있는 수음정과 커다란 바위나 돌무더기 정자인 석정이 있다. 누와각(樓閣)은 2층 집이면서 사람이 거쳐할 수도 있고 창문이 있어 사방을 관망하기 좋으며 규모가 큰 건물을 말한다. 제(齊)는 몸을 깨끗이 하고 조상에 대한 생각을 간절히 하는 곳. 당(堂)은 넓은 마루가 있는 곳을 말하고 헌(軒)은 집의 마루나 처마를 뜻하는 것이다.[참고문헌 함양군청홈페이지,경남도민신문 윤기식 기고문]

함양 심원정(尋源亭)은 논개사당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정자로,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의암호 입구에 있다. 이곳은 앞에 넓은 호수가 펼쳐지고 주변의 산세는 어우러져 동양화 한 폭을 연상케 한다. 이 호수를 일명 의암호라 하는데 이 뚝방 옆에 하나의 작은 정자가 있으니 바로 이곳에 오르면 하늘과 대자연을 얻을 수 있다. 심원정 내부에는 많은 선비들이 시화를 논했던 징표가 많이 있는데, 여기저기 글씨를 쓰고 글을 지은 흔적이 보인다. 심원정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천연대(天然臺)라는 행서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아랫부분이 풍파로 인하여 많이 희미해졌는데 자연스러우면서 힘이 있어 감상하기에 아주 좋다. 아쉽게도 서자의 낙관이 찍혀있지 않아 누구의 글씨인지 가름하기 어렵지만 단번에 명필의 글씨임이 확연하다. 심원정에는 가장 좋은 위치에 유재 송기면이 행서로 쓴 심원정(尋源亭)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심원이란 선비들이 지켜야할 근원적인 마음의 본심을 찾아가는 의미에서 심원이라 명명한 듯하다. 인간이란 어떻게 보면 가장 지혜가 있는 영장이라 생각하지만 그와 반대로 가장 우매한 존재일 때가 있다. 그래서 항상 본질적인 핵심을 찾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렇게 심오한 글자를 넣어 정자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심원정 글씨는 선비의 정신이 묻어 있는 아주 보기 드문 역작이며 귀한 편액이다. 글씨를 쓴 유재 송기면은 석정 이정직의 제자로 안진경 글씨체를 비롯해 동기창과 소동파의 글씨를 섭렵했으며 서론과 실기에 두루 다재다능했다. 심원정에는 유재와 친분이 있는 성재 김태석이 전서체로 쓴 송풍라월 편액이 있다. 송풍라월(松風蘿月)은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고 댕댕이 담장에 달이 비추인다’는 뜻으로 이곳의 풍광을 글씨로 표현한 것이다. 이 글씨를 쓴 김태석은 전주의 효산 이광열과 설송 최규상에게 전각과 서예를 가르쳐 준 전각가이며 서예가다. 또 바로 옆에서 대전으로 써진 만국태평(萬國泰平)이란 편액의 글씨는 아주 해석하기가 난해하고 기이하여 글자의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글자의 상단 부분에 작은 해서로 새겨져 있어 그 글자가 무슨 뜻인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 만국태평 편액에 사용된 글자는 현재 사용하는 글자가 아니고 소위 중국의 3대 시대라고 불리워진 하임금이 글씨를 썼다고 전해오는 하우전 글씨체다. 심원정에는 모두 11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심원정기는 한옥마을 학자인 금재 최병심이 썼으며, 또 심원정의 천연대 팔경 원운이 기록되어 이 주변을 읊었다. 이곳 팔경은 장판횡교(壯板橫橋), 월곡만하(月谷晩霞), 장포어화(읊 長浦漁火), 송탄귀범(松灘歸帆), 신사모종(新寺暮鍾), 삼고초적(三顧樵笛), 남양춘초(南陽春艸), 왕홍낙조(王興落照)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장수읍과 천천면의 풍경을 모두 머금고 있다. 심원정에서 조금 올라가면 논개사당인 의암사가 나온다. 이곳에 들러 논개의 굳은 정신을 기려보자.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기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진정한 아녀자로써 나라를 위해 기생으로 변장해 진주 남강에 왜장을 끼고 몸을 던졌던 것이다. 논개사당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데 사실 심원정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여유를 가지고 이곳에 들러 옛 선비들의 서화 몇 점을 감상한다면 이 초여름에 금상첨화일 것 같다.[글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

덕유산을 뿌리로 하여 남으로 양 산맥이 내리 뻗어 세 고을을 형성하였는데 중앙에 尋眞洞(심진동) 동편에 猿鶴洞(원학동) 서편에 花林洞(화림동)으로 이것이 옛 安陰三洞(안음삼동)이다. 이 고을에는 三佳勝景(삼가승경)이 있는데 尋眞洞(심진동)에는 尋源亭(심원정), 猿鶴洞(원학동)에는 搜勝臺(수승대), 花林洞(화림동)에는 弄月亭(농월정)을 말함이다. 이곳은 기백산 군립공원 용추계곡의 관문으로 첫 景觀(경관)이다. 亭子(정자)가 서 있는 바위는 龜岩(구암)이요, 그 아래 沼(소)는 淸心潭(청심담)이며 건너에 포개진 바위는 籠岩(농암)이다. 바라보는 상류 쪽엔 齋宮(재궁)폭포가이곳에 합류한다. 尋源亭(심원정)은 草溪鄭氏(초계정씨) 亭子(정자)로서당시 거제부사로 재직한 돈암 지영 선생께서 관복을 벗고 林泉(임천)으로돌아와 후진 양성에 주야로 훈육하였던바, 제자 제현이 스승을 찬양하기 위해 서기1558년 창건한 정자이다. 매년 봄 2월 25일이면 유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菜禮(채례)를봉행하고 있으며 후손은 1km 하류 안심동과 하비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조선 선조 때 거제부사 돈암정지영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소영 자적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70년에 후손들이 중수하였으나 풍수해로 훼철되고 1845년 7대손 정복운 등이 재건하였으며, 1948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심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단동으로 세워진 중층 누각 건물로서 내부는 모두틔워 경관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심원정은 옛 안의 3동 중의 하나인심진동 하천 변의 자연암반 위에 건립된 정자로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건물 자체도 사용부재나 결구방식 등이 무난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안정된 균형감을 보이고 있어 조선후기 정자건축물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충분한 건물이다.


광풍루(光風樓)는 조선 태종12년(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인 전우(全遇)가 창건하여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다. 그 후 조선 세종7년(1425) 김홍의(金洪毅)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 성종25년(1494)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光風樓)로 개칭 하였다.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조선 선조34년(1601)에 안의 현감 심종침이 복원하였고, 조선 숙종9년(1683)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5량 구조 팔작지붕 겹처마 목조와가로 되어 있다. 우람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높다.함양거연정(咸陽居然亭)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선생이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최초로 건립하였으며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자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자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 건립되었으며 1901년 중수가 있었다. 거연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9㎞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는 봉전마을 앞 하천내에 있는데, 이곳은 옛 안의 3동의 하나인 화림동 계곡으로서 농월정, 거연정, 용유담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거연정은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건립되어 있다.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망선대(望仙臺) 붙인 시(詩)

 濯足淸流坐草茵(탁족청류좌초인) 맑은 물에 발을 씻고 방석에 앉았으니,

寒梅疎竹倍精神(한매소죽배정신) 한매(寒梅)와 드문 대나무에 정신이 배나 맑아지네.

門迎天地知心月(문영천지지심월) 문을 열어 천지에서 내마음 아는 달을 맞고,

樽放湖山得意春(준방호산득의춘) 호산(湖山) 술잔 드니 뜻을 이룬 봄이로세.

啼鳥是非嫌近俗(제조시비혐근속) 새도 울며 시비하여 세속을 싫어하고,

落花飜覆愧猶人(낙화번복괴유인) 번복하는 낙화도 사람처럼 부끄러워 하네.

 

함양서산서원(西山書院)은 1703년(숙종 29)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 등이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의 병향(幷享)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사람의 제향을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 되었다. 1713년(숙종 39)에 ‘서산(西山)’으로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81년 정부의 보조와 유림의 협력으로 복원에 착수하였으며 1984년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종 선위에 즈음하여 절의를 지키신 어계 조려 선생께서 은둔하셧던 이곳 백이산아래에 영남의 유림들이 서생과 나머지 생육신 5분의 충절과 덕의를 존경하고 본받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537-2번지로서, '서산서원'의 '서산'이라는 명칭은 서원 앞쪽의 산의 옛 이름이 '서산(西山)이라는데서 따왔다. 지금은 백의산이라 부른다.


주벽 조려(趙旅, 1420~1489)는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경상남도 함안 출신. 할아버지는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열(悅)이고, 아버지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안(安)이다. 1453년(단종 1) 성균관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함안으로 돌아와서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는데, 이 서산을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만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 칭호 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노산군(魯山君)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億齡) 등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도 사당을 세워 제향 하도록 건의하였던바, 1706년에 그대로 시행되었다. 고향인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는 그를 비롯하여 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 등이 제향 되어있다. 1781년(정조 5)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어계집 漁溪集’이 남아 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함양군자정(咸陽君子亭)은 서하면 봉전마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있는 마을로서 선생이 처가에 들러 유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에서 유영하였다. 정선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 공의 5대손인 전세걸, 세택이 일두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나 내용을 알 수 없다. 군자정은 거연정으로부터 하류쪽으로 15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나 정면의 주칸을 5자, 측면의 주칸을 4자 정도로 잡아 규모는 작은 편이다. 군자정 역시 천연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세운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에는 방을 들이지 않고 모두 틔워 놓았다. 정면의 우측으로 판재로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5~18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장마루가 깔려 있는데, 이것도 원래는 우물마루였으나 후에 변형된 것으로 현재 함양군에서 원형복구를 추진 중에 있다. 천연의 평탄한 암반위에 조성하여 초석은 쓰지 않았고,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누하주는 직경이 큰 재목을 틀어지거나 울퉁불퉁한 채로 대강 다듬어 사용하였다. 4면의 추녀 끝부분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혔고 기둥상부에는 익공없이 직절시키고 모서리를 궁글린 보아지로 처리하였다.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가구는 5량 구조로 대들보위에 보방향으로는 판재를, 도리방향으로는 2단의 각재로 짠 十형의 부재로 종보를 받도록 하였고 종보위에는 대공없이 종보가 바로 종도리장혀과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좌, 우측면에서는 충량을 보내 대들보위에 얹었는데 충량의 머리부분은 직절하였으며 단청은 올리지 않았다. 홑처마에 팔작지붕형식이다.[참고문헌 함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여창(鄭汝昌)(세종32 1450~연산군10 1504)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참고문헌 함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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