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대가 정여창의 증조부 첫 정착
마을주민 대부분 하동정씨·풍천노씨
500년 전 한옥·돌담길 지금까지 유지
마을에 유서 깊은 고택과 종택 많아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듯 함양은 안동 못지않은 ‘뼈대 있는’ 양반의 고장이다. 특히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인 지곡면 개평마을은 500여 년 전 지어진 기와집과 돌담길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 14일 둘러본 개평마을 구석구석은 옛 시절 선비의 정신과 학문의 기세가 아직도 서려 있는 듯 뿌리 깊은 고향의 자부심을 내뿜고 있었다.
개평마을은 양쪽으로 개울이 흐른다. 마을 입구 개울 다리를 넘으면 양 갈래의 길이 나온다. 왼쪽은 옛날부터 있어온 길이고, 오른쪽은 새로운 문명의 혜택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왼쪽 길을 따라 지곡초등학교 방향으로 돌담길 담장이 늘어서 있고 기와집들이 하나하나 나온다.
이 마을에는 현재 104가구가 있고, 이 중 98가구에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전체 가구 중 60% 정도가 수백 년 전 외형과 공간을 그대로 사용할 정도로 전통가옥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높이 2~3m의 돌담을 따라 돌을 깔아놓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조선시대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봄 기운을 타고 골목 구석마다 자유롭게 돋아나는 새싹과 수백년 세월 동안 비와 바람을 버텨오며 바랜 담벼락의 돌들은 옛 고향의 정취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조선시대 부(富)를 과시하는 듯한 집집마다 큰 대문은 내 고향의 큰 집을 생각나게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에 우물과 장독, 가옥을 받쳐주고 있는 돌계단과 나무기둥, 그리고 아래가 텅 비어있는 대청마루는 영락없는 고향의 집이다. 어떤 집은 바람에 기와가 흩어진 채 숱한 옛 세월을 간직하고 있고, 또 다른 집은 마당 구석에 지어진 옛 화장실을 허물지 않은 채 놔두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도을주(51) 이장은 “풍수적으로 터가 좋아 자연재해가 거의 없어 전통가옥 모습이 그대로 있다”며 “아이를 비롯해 186명이 집에 거주하며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 이장은 “90세가 넘은 분이 살고 계시고, 80세 이상 되는 분이 18명이나 있을 정도로 장수마을이다”면서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 고향을 찾아온다”고 덧붙였다.
개평마을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의 개울이 마을을 가운데 두고 흘러 다시 하나로 합류한다. 개울에 끼여 있는 평평한 평지라고 해 介坪(끼일 개, 들 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또 지형이 마치 댓잎 네 개가 붙어있는 개(介)자 형상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는 유례도 있다.
배가 힘차게 항해하는 모습을 닮아 ‘행주형(行舟形)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한가운데는 배의 돛대를 형상하듯 뾰족한 잣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이처럼 기세가 좋아서인지 1년 내내 강수량이 일정해 풍수해를 입은 적이 거의 없다. 이는 개울 벼랑에 수백년을 지켜온 수많은 소나무들이 말해 주고 있다. 이들 소나무들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전해지는데, 300년에서 500년 된 적송들이다. 개울 건너 언덕에 올라서 내려보면 마을이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이춘철 함양군 문화관광해설사는 “마을에 소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바람을 세게 맞으면 부러지거나 쓰러졌을 텐데 벼랑에 걸쳐 있어도 넘어지질 않고 있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재해가 비교적 없다”고 말했다.
개평마을 주민들은 하동정씨와 풍천노씨가 대부분이다. 그 이전에 김해김씨가 촌락을 이뤄 살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규모가 커진 않았다. 하동정씨와 풍천노씨가 들어오면서 커다란 마을이 형성됐다.
도을주 이장은 “처음에는 김해김씨들이 살았는데 이후 하동정씨 일두 선생 할아버지가 마을로 이주해오고 노석동 씨가 와서 두 개의 성이 공존하는 집성촌이 됐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증조부로, 고려 말 호족이었던 당시 하동에서 살았는데 개인 민병을 거느릴 정도로 세가 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개평마을로 가라는 계시를 받아 이주를 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일두 선생 고모의 딸이 결혼을 하면서 현재 창원에 살던 풍천노씨 집안의 아들(노석동)이 데릴사위로 이 마을에 와 대종가를 이뤘다. 당시 풍천노씨는 개평마을에 온 것을 기념해 개울 건너 언덕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오른편의 한 그루는 말라 죽어 고사목이 됐다.
이 해설사는 “하동정씨가 풍천노씨보다 잘살아서 아마 사위를 데려온 것 같다”며 “풍천노씨가 심은 소나무 중 하나는 벼락을 맞아서인지 죽었고 살아 있는 하나는 500년 정도 돼 현재 ‘개평리소나무’라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개평마을의 가장 전성기는 조선시대였다.
일두 선생이 있을 시기에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고, 특히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이 마을에서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이 30여 명에 달할 정도로 학문의 열기가 높았다.
이처럼 학문을 빛내는 마을 내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 대기업에서 개평마을의 학문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 출신 대학교수를 조사한 결과 150여 명에 달한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 해설사는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다 타지로 나가 생활하고 있지만 학문에 매진하는 성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옥마을로 지정된 개평마을에는 유서 깊은 고택(사람이 살지 않은 집)과 종택(종손들이 사는 집)들이 많다. 일두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오담 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풍천노씨 대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하동정씨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 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일두 고택은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됐다. 1만㎡(3000여 평)에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12동만 남아 있다. 고택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은 지금의 금강산(봉래산), 지리산(방장산), 한라산(영주산) 등 명산 3개를 돌로 표현했다 한다. 오담 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는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성리학 대가 정여창의 증조부 첫 정착
마을주민 대부분 하동정씨·풍천노씨
500년 전 한옥·돌담길 지금까지 유지
마을에 유서 깊은 고택과 종택 많아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듯 함양은 안동 못지않은 ‘뼈대 있는’ 양반의 고장이다. 특히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인 지곡면 개평마을은 500여 년 전 지어진 기와집과 돌담길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 14일 둘러본 개평마을 구석구석은 옛 시절 선비의 정신과 학문의 기세가 아직도 서려 있는 듯 뿌리 깊은 고향의 자부심을 내뿜고 있었다.
개평마을은 양쪽으로 개울이 흐른다. 마을 입구 개울 다리를 넘으면 양 갈래의 길이 나온다. 왼쪽은 옛날부터 있어온 길이고, 오른쪽은 새로운 문명의 혜택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왼쪽 길을 따라 지곡초등학교 방향으로 돌담길 담장이 늘어서 있고 기와집들이 하나하나 나온다.
이 마을에는 현재 104가구가 있고, 이 중 98가구에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전체 가구 중 60% 정도가 수백 년 전 외형과 공간을 그대로 사용할 정도로 전통가옥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높이 2~3m의 돌담을 따라 돌을 깔아놓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조선시대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봄 기운을 타고 골목 구석마다 자유롭게 돋아나는 새싹과 수백년 세월 동안 비와 바람을 버텨오며 바랜 담벼락의 돌들은 옛 고향의 정취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조선시대 부(富)를 과시하는 듯한 집집마다 큰 대문은 내 고향의 큰 집을 생각나게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에 우물과 장독, 가옥을 받쳐주고 있는 돌계단과 나무기둥, 그리고 아래가 텅 비어있는 대청마루는 영락없는 고향의 집이다. 어떤 집은 바람에 기와가 흩어진 채 숱한 옛 세월을 간직하고 있고, 또 다른 집은 마당 구석에 지어진 옛 화장실을 허물지 않은 채 놔두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도을주(51) 이장은 “풍수적으로 터가 좋아 자연재해가 거의 없어 전통가옥 모습이 그대로 있다”며 “아이를 비롯해 186명이 집에 거주하며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 이장은 “90세가 넘은 분이 살고 계시고, 80세 이상 되는 분이 18명이나 있을 정도로 장수마을이다”면서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 고향을 찾아온다”고 덧붙였다.
개평마을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의 개울이 마을을 가운데 두고 흘러 다시 하나로 합류한다. 개울에 끼여 있는 평평한 평지라고 해 介坪(끼일 개, 들 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또 지형이 마치 댓잎 네 개가 붙어있는 개(介)자 형상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는 유례도 있다.
배가 힘차게 항해하는 모습을 닮아 ‘행주형(行舟形)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한가운데는 배의 돛대를 형상하듯 뾰족한 잣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이처럼 기세가 좋아서인지 1년 내내 강수량이 일정해 풍수해를 입은 적이 거의 없다. 이는 개울 벼랑에 수백년을 지켜온 수많은 소나무들이 말해 주고 있다. 이들 소나무들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전해지는데, 300년에서 500년 된 적송들이다. 개울 건너 언덕에 올라서 내려보면 마을이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이춘철 함양군 문화관광해설사는 “마을에 소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바람을 세게 맞으면 부러지거나 쓰러졌을 텐데 벼랑에 걸쳐 있어도 넘어지질 않고 있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자연재해가 비교적 없다”고 말했다.
개평마을 주민들은 하동정씨와 풍천노씨가 대부분이다. 그 이전에 김해김씨가 촌락을 이뤄 살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규모가 커진 않았다. 하동정씨와 풍천노씨가 들어오면서 커다란 마을이 형성됐다.
도을주 이장은 “처음에는 김해김씨들이 살았는데 이후 하동정씨 일두 선생 할아버지가 마을로 이주해오고 노석동 씨가 와서 두 개의 성이 공존하는 집성촌이 됐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증조부로, 고려 말 호족이었던 당시 하동에서 살았는데 개인 민병을 거느릴 정도로 세가 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개평마을로 가라는 계시를 받아 이주를 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일두 선생 고모의 딸이 결혼을 하면서 현재 창원에 살던 풍천노씨 집안의 아들(노석동)이 데릴사위로 이 마을에 와 대종가를 이뤘다. 당시 풍천노씨는 개평마을에 온 것을 기념해 개울 건너 언덕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오른편의 한 그루는 말라 죽어 고사목이 됐다.
이 해설사는 “하동정씨가 풍천노씨보다 잘살아서 아마 사위를 데려온 것 같다”며 “풍천노씨가 심은 소나무 중 하나는 벼락을 맞아서인지 죽었고 살아 있는 하나는 500년 정도 돼 현재 ‘개평리소나무’라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개평마을의 가장 전성기는 조선시대였다.
일두 선생이 있을 시기에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고, 특히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이 마을에서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이 30여 명에 달할 정도로 학문의 열기가 높았다.
이처럼 학문을 빛내는 마을 내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 대기업에서 개평마을의 학문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 출신 대학교수를 조사한 결과 150여 명에 달한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 해설사는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다 타지로 나가 생활하고 있지만 학문에 매진하는 성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옥마을로 지정된 개평마을에는 유서 깊은 고택(사람이 살지 않은 집)과 종택(종손들이 사는 집)들이 많다. 일두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오담 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풍천노씨 대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하동정씨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 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일두 고택은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됐다. 1만㎡(3000여 평)에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12동만 남아 있다. 고택 마당에 조성한 석가산(石假山: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은 지금의 금강산(봉래산), 지리산(방장산), 한라산(영주산) 등 명산 3개를 돌로 표현했다 한다. 오담 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는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